Institute of Health & Environment Seoul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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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 Journal of Public Health - Vol. 52 , No. 2

[ Article ]
The Korean Journal of Public Health - Vol. 52, No. 2, pp. 1-16
Abbreviation: The Korean Journal of Public Health
ISSN: 1225-6315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Sep 2015
DOI: https://doi.org/10.17262/KJPH.2015.09.52.2.1

원진레이온 직업병투쟁의 협상론적 해석
강태선
서울대학교 보건환경연구소

Application of Negotiation Theory to Occupational Disease Victims’ Struggle against Wonjin Rayon
Taesun Kang
Institute of Health and Environment Seoul National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 *Taesun Kang(bonab2010@gmail.com, 02-880-2824) Graduate School of Public Health, Seoul National University, 599 Gwanak-ro, Gwanak-gu, Seoul 151-742, Korea.


Abstract

Wonjin Rayon Co. occupational disease incident was the milestone of occupational health and safety system and occupational compensation system in South Korea. The outbreak of carbon disulfide poisoning was officially recognized and compensated by occupational disease victims’ victory against employer and government. The goals of this study were 1) to understand the development of the struggle step by step 2) to know how did the weak, occupational disease victims get favorable negotiation outcomes from the strong, employer and government. Negotiation power between the negotiation parties was analyzed in the basis of Habeebs's asymmetric negotiation theory. The occupational disease victims successfully enhanced the issue-specific power with proper alternatives, overwhelming commitment and control, applied use of brinkmanship and threat. The occupational disease victims' struggle against Wonjin Rayon Co. was in well accord with the Habeeb's negotiation theory.


Keywords: Wonjin Rayon, occupational disease, asymmetric negotiation

I. 서론

1999년 6월 5일 구리시 인창동에 원진녹색병원, 원진노동환경건강연구소, 원진복지관으로 구성된 원진종합센터가 문을 열었다. 이 센터는 1988년 원진직업병피해자가족협의회(원가협)가 원진레이온㈜의 직업병(이황화탄소 중독증)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 이래 십 년을 넘게 이어온 긴 투쟁과 협상의 대표적인 결과물이고 원진레이온 직업병피해자들이 결국 승리했음을 증명하는 증표였다. 원진레이온 직업병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풀어나가는 과정은 한 사업장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획기적 개정은 물론 산업안전보건법의 전부개정을 가져왔다.

원진레이온은 한국산업은행(이하 산업은행) 법정관리하에 있었기 때문에 사측은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원진레이온 직업병과 관련된 갈등은 주로 원진레이온 직업병피해자 측과 기업 및 정부간의 투쟁이었다. 어떻게 피해자단체는 기업과 정부라는 강자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을까? 이 갈등의 조정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각 당사자들은 사건의 경과에 대한 기록을 저마다의 시각을 가지고 남겼는데 주로 서사적 기술에 그쳤을 뿐 갈등의 전개와 해소과정을 이론적 틀에 입각하여 분석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이 연구에서는 원가협 등이 직업병 문제를 언론에 알리기 시작한 1988년 7월부터 원진노동자 직업병위원회(원노위)와 산업은행간 1997년 4.24. 전문병원 건립을 위한 기금출연 합의서가 조인되는 날까지 약 9년간의 직업병투쟁의 전개를 단계별로 재구성하여 살펴보고 약자인 직업병피해자들이 강자인 정부를 상대로 어떻게 협상에 승리 했는지를 Habeeb의 비대칭 협상모델(asymmetric negotiation)을 이용하여 분석하였다.


Ⅱ. 원진레이온 직업병투쟁의 전개

원진레이온 직업병투쟁의 구체적 전개에 관하여 비교적 자세한 기록은 「원진레이온 백서-어제는 산업역군, 오늘은 산업폐기물」있는데 사건의 배경부터 원진레이온 폐업 직후까지의 상황을 정리한 것이다[1]. 검진 및 판정위원회의 사측 전문가로 활동했던 의사들이 쓴 단행본 「원진레이온과 이황화탄소 중독」은 판정위원회에 활동과 이황화탄소 중독증 판정과 관련된 의학적 내용을 위주로 하고 있다 [2]. 원진노동자 직업병위원회(원노위)가 투쟁 10주년을 기념하여 발간한 「전사」는 사건 배경부터 폐업이후 과정을 모두 담고 있는 사건 전개에 관한 가장 자세한 기록에 속한다[3]. 그 외 피해자 측 전문가, 담당 공무원 등의 회고형식의 글, 당시의 각종 소식지, 성명서, 주요 신문기사 등이 남아 있다 [4-7]. 이뿐만 아니라 최근 당시 활동했던 인사들이 팟캐스트 방송에서 회고한 녹취자료에도 문헌에 수록되지 않았던 정보가 일부 있었다 [8, 9].

원진레이온 직업병 협상과정은 1988년 피해자 측의 조직적 투쟁이 시작된 시점에서부터 산업은행과의 전문병원 기금출연 합의가 있었던 1997년까지 약 10년에 가까운 긴 기간이었다. 원노위측은 이 과정을 주요 이슈 별로 묶어서 총 5기로 분류하였는데[3, 4] 이는 피해자 측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었기 때문에 나중에 결합한 사람들도 배려한 구분방법으로 보인다. 사실 핵심적인 투쟁은 1988년 중증 질환자로 구성된 원가협 등의 투쟁과 1991년 고 김봉환씨의 직업병인정과 관련하여 유족 등의 2차 투쟁이었다. 1992년 이후에도 많은 갈등과 합의가 있긴 했으나 부수적인 것이었으며 특히 1993년 5월 공장이 문을 닫은 이후에는 직업병인정과 관련된 것이었다기 보다는 재취업, 전문병원 설립 등 사후대책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원진레이온 직업병피해자 측의 사측에 대항한 투쟁 및 협상을 제1기 1988.7.~1989.12., 제2기 1990.1.~1993.5., 제3기 1993.6.~1997.4. 등 총 3단계로 구분하였다 (표 1).

표 1. 
원진레이온 직업병투쟁과 협상과정의 단계별 주요 사건일지
구분 년도 월일 주요 사건
배경 1964. 일본 도레이레이온사의 방사기계 도입
1966. 12.15. 흥한화학섬유㈜ 도농공장 준공식 [경기도 양주군(현 남양주시) 항금면 도농리, 대표이사 박흥식]
1967. 7.15. 시험가동 만 5개월 20여일 만에 15톤 인견사(비스코스) 생산단계 이름
1972. 4. 세진레이온(주)로 상호변경 (대표이사 정영삼)
1976. 6. 원진레이온㈜로 상호변경 (대표이사 이원천)
1979. 5.24. 원진레이온 법정관리 결정 및 신청 (총 부채 6백80억원)
1981. 4. 2. 원진레이온 공장 주변 ‘아황산가스’ 오염문제 보도
" 8. 8. 원진레이온 홍원표 직업병 인정 ‘아황산가스 중독’(국립의료원)
" 12.29. 서울통합변호사회 원진레이온 인근주민들 원고 손해배상청구(이후 취하)
1983. 1.13. 위 단체 직업병 승인된 홍원표 손해배상 및 위자료 청구소송 진행
1987. 1. 원진레이온 퇴사자 정근복, 서용선,김용운,강희수 등 직업병 여부 판정을 위한 진정 (청와대, 노동부)
" 3. 5. 노동부 원진레이온 사측에 노동자 특수검진 및 작업환경측정 지시
" 3.~4. 직업병 여부 판단 위한 검사 및 작업환경평가 (고려대 환경의학연구소) : 34명 다발성말초신경염 진단
" 5.11. 노동부 정근복 등 4인에 대하여 직업병 승인 및 요양결정 통보
" 6.23. 노동부 정근복 등 4인에 대하여 치료종결 및 장애보상
1988. 1. 원진레이온 퇴사자 정명섭 등 2인 직업병 요양을 위한 진정서 제출 (노동부)
" 1. 백영기 사장 취임 (전창록 사장 임기만료로 전무에서 승진함, 육사12기 육군소장 출신)
" 6. 2. 위 정명섭 등 2인 직업병 승인 및 요양결정
" 5.11. 온도계 공장 근무 15세 소년 두달만에 수은중독'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보도
" 5. 위 정근복 등 4인 노동부에 재요양 신청했으나 묵살당함
" 7.2. 수은중독증으로 요양중이던 문송면군 사망 (가톨릭 여의도성모병원)
" 7.3. 문송면군 사망을 주요 일간지와 방송사가 보도함
" 7.8. 초선 의원 노무현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의에서 문송면군 사망 언급
" 7.8. 문송면군 수은중독사건대책위' 과천 노동부 본부 앞 시위
" 7.10. 문송면군 수은중독사건대책위' 서울남부지방노동사무소 앞 시위
" 7.17. 문송면군 장례식 (산업재해노동자장)
제1기 1988. 7.19. 정근복 등 4인과 가족들(이하 피해자 가족) 평민당 구리지구당, 구리노동상담소 방문하여 도움 호소
" 7.21. 구리노동상담소 관련 보도자료 제작 각 언론사에 배부
" 7.22. 한겨레 신문 원진레이온 직업병문제 특종보도
" 7.23. ‘문송면군 수은중독사건대책위’가 '원진지원대책위’로 결성됨(이하 대책위)
" 7.27. 피해자 가족들 원진레이온 사장과 면담요청 묵살당함 (7.29~8.1간 매일 방문)
" 7.29. 노동부 본부 원진레이온 특별감독 실시 (8.4까지 5일간)
" 8.1. 피해자가족들 사장실 일시점거(노동부 2백5십만시간 무재해 표창 확인)
" 8.4. 원진레이온 직업병발생 진상조사반(국회의원 박영숙·노무현, 의사 양원호 등) 현장 방사과 방문조사 및 8.5 결과 발표 (13년간 8명 중독증 사망)
" 8.11. 대책위 노동부 본부 항의 방문하여 근로기준국장 등 면담하고 결단 촉구
" 8.16. 대책위 김대중 평민당 총재 면담하고 지지 및 지원 요청
" 8.18. 피해자 가족들 ‘원진레이온 피해자 및 가족협의회(이하 원가협)’ 결성 (17가구)
1988. 8.20. 피해자 측(원가협,대책위)와 회사 전무,총무부장 협상 (대표성 문제를 들어 원가협 측이 거부함)
" 9.1~8. 피해자 측 언론사, 노동조합, 학생운동 조직, 국회의원 등 방문 진상보고
" 9. 9. 피해자 측 평민당 구리지구당 사무실 점거 (9.14 올림픽 성화봉송 예정된 도로옆 소재)
" 9.13. 피해자 측(원가협, 대책위)과 사측(사장단) 양해각서 체결
" 9.14. 원가협측과 사측 합의서 작성 (평민당 박영숙 부총재 사무실에서 박영숙·노무현·이상수 의원 입회):장애 1-14등급에 따라 1억원~1천만원 지급
" 9. 9~10월간 원가협 여러 농성장과 행사장을 방문하여 격려 방문
" 10. 원가협 회원 입원 시작 (합의서에 의한 정밀검진 시작에 따름)
" 11.26. 문송면 수은중독 사건을 드라마로 엮은 KBS 논픽션 드라마 '송면이의 서울행' 방영
1989. 3. 사측 장애보상 일시금이 아닌 3년에 걸쳐 6회 분할 지급하겠다고 일방 통보
" 4.2. 보상지급 방법에 관한 합의 결렬 (원가협 일시불 요구 대 사측 분할지급)
" 8.10. 원가협측과 사측간 보상금 분할지급에 관한 보충합의서 작성 (3회 분할지급, 6인위 판정대상은 '1988.12월말 현재 노동부 등록 유소견자 65명으로 함)
" 8.31. 피해자 측 보상금 1차 29명 지급 받음
" 9. 8. 사망자 가족 회사 항의방문과 장애등급판정을 받았으면서도 보상금 없는 4인 방문
" 9.28. 회사측 사망자 가족 농성을 이유로 미지급 4명과 2,3차 보상금을 재검토 통보
" 11.1. 구리 노동상담소 박무영 소장 괴한 5명에 피습 (경향, 동아, 한겨레 보도)
" 11.26. 최초 4인 진정인 중 한 사람 정근복 요양중 사망
" 12.5. 노동부 '업무상 재해인정기준' (노동부 예규 제167호) 개정 “명백한 경우”→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로 개정
제2기 1988 12.14. 후처리과 이명희(45) 고혈압 및 뇌출혈로 사망 (직업병 인정 받지 못함)
" 12. 원진레이온 노동조합 집행부 작업환경개선 관련 개선안 채택
" 12.21. ‘원진레이온직업병피해노동자협의회(이하 원노협)’ 준비모임
" 12.26. 노동조합 조합원 대상 직업병예방과 작업환경개선에 관한 교육 실시
" 12.26. 원가협 회원인 퇴직 노동자 정근복씨 투병 중 사망 (88년 원가협 합의 이후 최초의 사망자)
1990. 1.11.~12. 노동조합 주최로 ‘산업재해와 직업병에 관한 공청회’ 개최
" 1. 사측 '산업재해와 직업병에 관한 공청회'를 홍보한 조합원 3명 해고
" 1.22. 사측 ‘환경개선방안’ 소책자 제작 배부
" 2.24. 원진레이온직업병피해노동자협의회(이하 원노협)’ 발족 (12명)
" 5.15. 원노협 5.30.까지 16일간 회사정문 봉쇄 요양신청서 발급 및 사측 공개사과 요구
" 5.16. 원진레이온 제9대 노동조합위원장 선거 (전광표 피선, 민주노조로 전환)
" 5.17. 원노협 정문에서 천막농성 돌입
" 5.31. 원노협과 회사측간 1차 합의서
" 6.~10. 1차 합의서 채택 후 퇴직 직업병환자 원노협 가입
" 10.3. 원노협과 회사측간 2차 합의
" 10.16. 이 시기 이황화탄소 중독증으로 사망 1명 비롯 68명 직업병인정되었고 판정을 기다리는 사람 150명
1991 1. 5. 원노협 회장 의정부노동사무소 방문, 노동부 김봉환씨 직권 특진약속
" 1. 5. 직업병의증으로 정밀검진 절차 준비하던 퇴직자 김봉환씨 사망
" 1. 6. 원노협, 대책위 등 ‘원진레이온 김봉환씨 직업병사망사건 대책위’ 결성
" 1. 9. 대책위와 사측 김봉환씨 사체 부검 및 직업병 여부 검사에 대하여 합의
" 1. 김봉환씨 직업병 여부 판명불가 (4인 판정위원회)
" 1.~3. 장례식 무기한 연기 및 직업병 승인 투쟁
" 3.21. 주요 일간지 대구 페놀 방류사건 일제히 보도
" 3.31. 김봉환씨 장례식 1차 시도하다가 회사 정문앞에서 저지당하자 정문앞 농성 돌입
" 4.26. 직업병 심각하다' 조선일보 1면 톱 연재 시작 (4.26~28), 23면에 요양 중이던 권경룡씨 자살(4.12) 뒤늦게 알려짐. 조선일보는 1면에서 대구 페놀 방류사건을 함께 다룸
" 5.2. 국회 실태조사 소위원회(위원장 이인제 의원) 원진레이온 방문
" 5. 3. 노동조합 임금인상, 매각이전 반대, 김봉환씨 직업병 인정 등 요구하며 파업
" 5. 6. 국회상임위 실태조사 소위의 보고서 받고 직업병 제도개선 필요성 논의
" 5. 7. 노동부 ‘직업병종합대책추진기획단’ 구성 (직업병판정 및 치료 합리화 등)
" 5. 9. 사측 교섭 요청
" 5.19. 김봉환씨 대책위와 사측간 합의 타결 (김봉환씨 유족보상 합의)
" 5.21. 이황화탄소 만성중독 인정기준 합의 (1장해군,2장해군)
" 5.21. 김봉환씨 장례식 (사망 137일만)
" 5.27. 최병렬 노동부 장관 원진레이온 방문하여 노사와 간담회
" 6.12. 김봉환씨 직업병사망사건 대책위를 ‘원진직업병대책협의회(원대협)’ 전환
" 6.14. 노동부 장관 직업병종합대책 대통령 보고
" 7.22. 위 합의에 의거 노조가 지정하는 서울대보건대학원 역학조사 개시
" 8. 방사과 1공장 폐쇄
" 11.1. 노동부 '업무상 재해인정기준' (노동부 예규 제205호) 개정·시행
1992 4.30. 서울대보건대학원 역학조사결과발표(원대협 주최 공청회) 인정기준 충족 32명외 1개 이상의 이상소견인 유소견자 88명 발견 (54명 재직자)
" 5.3. 위 54명 중 김정숙(후처리과 근무) 야근 중 쓰러졌고 입원함
" 5.4. 사측 위 54명 전원 노무부로 작업전환 배치
" 5.20. 유소견자(이상소견 1개 증상 발현자로 직업병 불인정자)를 중심으로 가칭 ‘88그룹’ 결성 및 출정식 ( 업무상재해 인정기준 완화 요구 : 1가지 증상만 있어도 직업병을 인정해 줄 것 요구)
" 6.~7. 88그룹을 중심으로 업무상질병 인정기준 완화를 위한 서명운동 및 국회청원
" 11.16. 88그룹 명동성당에서 단식농성 돌입
" 12. 노동부 본부 업무상질병 인정기준 관련 산업의학회 용역결과 추후 발표 결정 (당초 12.15. 예정)
" 12. 5. 88그룹 명동성당 단식농성 풀다
1993 3. 김영삼정부 경제수석실 원진 폐쇄 결정 (신경제 100일 계획 관련)
" 4.13. 88그룹 중심 20명 직업병인정을 요구하며 의정부지방노동사무소장 부속실 점거 농성 (8일 이상)
" 5. 6. 노동부 완화된 '업무상재해 인정기준'(노동부 예규 제234호) 발표 : 노출수준 10ppm 이상 → 10ppm 내외로 조정, 특정 1가지 이상소견시 인정
" 5.15. 원진레이온 화재안전진단 등을 이유로 휴업 공고, 5.16부터 휴업 돌입
제3기 1993 6. 8. 민자당 정책조정실장 주재하 관계차관회의에서 원진레이온 폐업 결정
" 6.21. 노조, 원가협, 원노협 및 관리직 사원 등 ‘직업병대책과 고용보장쟁취 위한 원진레이온 비상대책위원회(이하 원진비대위)’ 출범
" 7.5. 산업정책심의위 원진레이온 폐업 결정
" 7.31. 원진비대위 폐업관련 요구안 제출 (향후 민사배상금 350억, 재취업, 폐업에 따른 정밀검진, 폐업위로금 등)
" 8.4. 원진레이온 회사 파산선고 신청 (서울지법 의정부지원)
" 9.3. 노동부 및 산업은행 교섭안 제출 (민사배상금 마련 방안 등)
" 11. 4. 노동조합, 사용자, 정부(노동부) 폐업관련 잠정협의안 마련 (6차에 걸친 간담회 결과)
" 11. 9. 노동조합, 사용자, 정부(노동부) 폐업관련 합의
" 11.28. 원진직업병 관리재단 설립 (노동부 비영리재단)
1994 1.2. 원가협, 원노협 등 피해자단체 통합 ‘원진직업병피해자협회(원직협)’ 결성 (피해자 권익보호와 건강유지, 산재추방 등 목적)
" 1.4. 원진비대위 노·정 재취업특별위원회 구성을 노동부에 요청했고 이에 노동부 특별위원회 합의 및 정부투자기관에 취업 독려
" 4. 원진비대위 재취업을 포함한 원진레이온 합의이행 촉구 결의대회 수차례 개최 (종묘,명동,여의도 등)
" 4.21. 나전모방 원진기계를 산업은행으로부터 54억1천만에 구매하여 중국 단둥시에 수출 계획 발표
" 5.1. 원진비대위 원진기계 중국수출 반대 및 중국대사관 항의방문 (동국대 메이데이 집회)
" 6. 노동부 재단이사진 변경 승인으로 피해자 측 대표가 재단 운영 시작
1995 4.29. 노동부 업무상재해인정기준 개정 (폭로기간 수개월 → 2년으로 개정)
1996 2. 원진 공장부지 부영(주)에 매각 (3,670억원), 산업은행은 원진 채무를 제하고 1,600억원 차액 이득
" 7.23. 원직협과 원진비대위 양 단체 지도부 '원진재단 추가출연기금 확보 및 전문병원 설립을 위한 공청회' 개최할 것을 합의
" 8.30. 원직협과 원진비대위 통합 ‘원진노동자 직업병위원회(이하 원노위)’ 결성(위원장 구기일) 및 산업은행 이득금 일부 원진전문병원 건립기금 추진에 함께하는데 합의
" 9.18. 원노위 원진전문병원 건립기금 및 재해위로금 추가출연 관련 산업은행과 첫 실무교섭
1997 4. 8. 원노위 원진의원 개원 (직업병판정 689명 중 6백37명이 피해보상금의 일부를 모은 3억원 자본)
" 4.24. 원노위와 산업은행간 기금출연 추가합의서 ('93년 150억원외 전문병원 건립 위해 200억원)


그림 1. 
원진레이온 직업병 협상과정 정리

1. 배경

원진레이온(주)는 일본에서 6년된 중고기계를 1964년 흥한화학섬유㈜ 박흥식이 도입하여 당시 경기도 양주시 도농리 (현 남양주시 도농동)에 국내 유일의 인조견사 사업장으로 1966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하여 1993년 폐업했다. 1987년 1월 원진에서 14~15년을 근무하면서 두통과 성격변화, 기억력감퇴, 팔다리의 감각이상, 통증, 마비 등 많은 증상에 시달리면서도 병명이 무엇인지 진단조차 받지 못하던 네 사람 정근복, 서용선, 김용운, 강희수 등이 청와대와 노동부에 진정서를 보내어 정밀검사를 호소하였고 이황화탄소중독으로 진단을 받았다. 직업병으로 인정되면서 문제해결의 길이 열리는 듯했으나 회사는 6백만원씩에 민∙형사상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것을 조건으로 합의를 요구하였고 당시 산재보험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노동부도 단 1달간의 요양치료 후에 치료를 종결하고 장해보상금을 지급했다. 이렇게 되자 더 이상의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된 환자들이 다시 곤란에 빠지게 되었고 이들의 어려운 사정이 1988년 7월 구리노동상담소 등을 거쳐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2. 제1기(‘88.7.~’89.12.) 원가협 투쟁에서부터 노동부 업무상 재해인정기준 1차 개정까지

한겨레신문에 이들의 처지가 크게 보도되자 곧바로 원진레이온을 다녔던 사람 중에서 비슷한 증상으로 고통 받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원진레이온 피해노동자 및 가족협의회(원가협)’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이 사건 직전까지 고 문송면 산업재해노동자장으로 모였던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와 노동과건강연구회,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 등 여러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원진직업병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결성하고 직업병보상을 위한 싸움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대책위는 진상조사와 항의방문, 보고대회와 성명서 발표, 기자회견 등을 8월 내내 진행했고 회사와 노동부, 국회를 몇 차례를 왕복하며 항의집회, 진정 등을 거듭했고 여론의 호응을 받았다. 결정적으로 원가협 등은 9월 9일 평민당 구리지구당 사무실을 점거하였는데 이 곳은 며칠 뒤인 14일 9.17. 올림픽개막식에 쓰일 성화가 지나갈 지점이었다. 결국 9월 14일 평민당 박영숙 의원(평민당 부총재)의 중재로 피해자 측과 회사와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4].

노동부는 위 합의에 보조를 맞추기 산업안전보건법상의 이황화탄소 작업환경 중 노출기준을 기존 20 ppm에서 10 ppm으로 낮추었고(노동부고시 제88-69호, 1988.12.23.) 이듬해 12월에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의 ‘업무상 재해인정기준’에 관한 노동부 예규를 개정∙시행하였다(노동부 예규 제167호, 1989.12.5.).

3. 제2기(‘90~’93.5.) 원노협의 협상과 고 김봉환씨 직업병인정 투쟁으로부터 원진레이온 폐업까지

합의 이후 검진은 회사측과 피해자가 각각 3명씩 추천한 6인 판정위원회를 통해 1989년 35명이 직업병으로 진단을 받아 치료와 보상금을 받았다. 1차 합의 당사자가 ‘원가협’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추가대상 검진접수 기한(1988.10.31.)이 촉박하여 소식을 접하지 못한 많은 퇴직자들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그 이후 판정 신청자들은 ‘원진레이온직업병피해노동자협의회(이하 원노협)’을 결성하고 투쟁을 전개하여 사측과 두 차례의 합의서를 추가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검진기관이 고대병원 한 곳으로 지정되어 1988년 9월에 합의사항에 따라 접수한 사람이 1990년 6월에야 결과를 받는 등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0년 5월과 10월 2차례에 걸쳐 원노협측은 사측과 합의서를 채택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문제를 감안하여 합의서에 판정대상자를 ‘유해부서 근무하여 이황화탄소 중독의 가능성이 있는 자’로 한정하였는데 이것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 불씨가 되었다.

검진을 기다리던 퇴직자 김봉환씨가 1991.1.5.에 사망한 것이다 원액과에 근무하던 김봉환씨는 합의서상 비유해부서 근무자였으므로 회사로부터 요양신청서의 사업주 날인을 받지 못했지만 의사로부터는 이황화탄소중독의증이라는 소견서를 받았다. 그는 노동부에 직업병검진을 받게 해달라고 호소해 오던 중 결국 노동부로부터 직권으로 요양신청서를 내주겠다는 확약을 받았는데 바로 그 날 쓰러져 숨진 것이다. 사망에 이르게 된 원인과 직업병 여부를 가리기 위한 부검이 최초로 실시되었으나 부검을 실시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판단을 내릴만한 지식과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뇌출혈이라는 보고만을 제출했고 서울대병원에서 실시한 조직검사의 소견을 놓고 직업병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이 붙었다. 사측 추천의사와 피해자 측 추천의사 사이에서 직업병 여부에 대한 판정이 내려지지 못하여 장례를 먼저 치르기로 하였는데 86일 만이었다. 장례식도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는데 당일 유족과 대책위가 회사 정문 앞에 관을 놓고 노제를 지내던 중 회사측 사람들과 충돌이 빚어졌다. 유족과 대책위 사람들은 관을 회사 정문 앞에 두고 다시 농성에 들어갔다. 이 농성은 52일간 이어졌는데 이 사이 직업병 피해자 권경룡씨가 정신장애와 통증 등으로 신병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일이 발생했다[4]. 언론이 이를 김봉환씨 관련 투쟁과 함께 일제히 보도하면서 여론이 집중되었다. 1991년 4월 말부터 5월 초 사이 주요 언론은 거의 매일 대구 페놀사건과 원진레이온 직업병 사건을 한 몫에 보도했는데, 사람들이 그간 생소했던 직업병문제를 보편적인 문제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국회는 실태조사 소위원회를 파견하였다. 위원회는 김봉환씨는 이미 사망하였기 때문에 직업병 판정을 하는 데 문제가 있으나, 재직 당시의 작업환경과 근속년수 등 직업력과 임상∙부검∙병리 소견을 고려할 때 직업병에 걸렸을 개연성이 충분한 것으로 판단하였고 이를 상임위에 보고했다. 이 보고서에 따라서 1991. 5.19.에 회사, 유족 및 대책위 그리고 노동부가 장애등급 7등급에 해당하는 유족보상 등을 중심내용으로 한 합의서에 서명하면서 137일만에 김봉환씨의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이 합의서는 기존 원가협, 원노협의 합의서와는 달리 전 부서의 근로자에게 해당 유해요인에 의한 특수검진 실시를 담고 있다. 즉 1990년 원노협의 합의서가 ‘유해부서’만을 검진대상으로 한 데 비해 이번 합의서에서는 그런 구분을 두지 않은 것이다. 이에 따른 검진은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이 실시했는데 검진결과 32명의 이황화탄소 만성중독환자가 발견되었다 [10]. 이 32명 중에는 운반포장 4명, 원액과 3명, 정비과 3명 등 기존 합의서에 있는 ‘비유해부서’에서 근무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새로운 합의서가 기존의 원노협의 그것에 비해 합리적인 것이었음을 반증하였다. 이 조사에서 직업병 인정기준은 1991년 11월에 신설된 이황화탄소 업무상재해 인정기준(노동부 예규 제205호, 1991.11.1.)에 따른 판단이었는데 조사반장인 김정순 교수는 노동부 인정기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즉각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이황화탄소 만성중독 유소견자도 88명이 더 있다고 발표했다. 이들은(가칭 ‘88그룹’) 발표 직후인 1992년 5월에 명동성당에서 단식농성을 하는 등 노동부 업무상 재해인정기준 개정을 위한 투쟁에 들어간다. 이에 노동부는 직업병심의위원회에서 직업병심의위원들과 임상전문가가 참여한 가운데 대한산업의학회, 서울대보건대학원, 인의협의 안을 검토하고 토의를 거쳐 산업보건연구원이 최종안을 마련하여 1993년 5월 이황화탄소 만성중독 인정기준을 개정하였다(노동부 예규. 제234호). 인정대상 작업환경 공기 중 이황화탄소의 농도가 ‘10ppm 정도 이상’에서 ‘10ppm 내외 수개월이상으로’ 바뀌었고 장해기준도 확대 되었다 [4, 11].

4. 제3기 (‘93. 6~ ’97. 4) 폐업부터 전문병원 건립을 위한 추가기금출연 합의까지

원진레이온 노동자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하였지만 1993년 6월 원진레이온 폐업안은 당정협의회를 통과하였고 정부의 의결을 거쳐 폐업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이제 원진레이온 노조, 원가협, 원노협 및 관리직 사원 등은 하나가 되어 ‘직업병대책과 고용보장쟁취 위한 원진레이온 비상대책위원회(이하 원진비대위)’ 출범시켰고 저항했지만 서울 인근 아파트부지를 제공하여 실리를 얻고 더 이상의 문제발생을 제거하려는, 산업은행 등 관계당국과의 충돌은 길게 가지 않았다. 6차에 걸친 폐업에 관한 간담회 끝에 회사와 노동조합은 노동부, 산업은행 등이 입회한 가운데 1993.11.9. 폐업 및 폐업 후속대책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한다. 이를 통해 직업병 관리기금이 조성되었고 기금을 관리하기 위해 산업은행과 노동부는 비영리 공익법인인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을 만들었다. 재단기금으로 총 150억원을 현금 50억원, 파산채권으로 50억원, 그리고 토지를 파는 등의 수단으로 잉여금 발생시 50억원을 산업은행이 내도록 하고 환자진료를 위한 진료기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고 약속하였다. 거의 때를 같이하여 원가협과 원노협은 ‘원진직업병피해자협회(원직협)’으로 통합되었다 [4].

원진레이온에는 1970년대 평균 약 3000명의 상시 노동자가 근무했고 1980년대에도 1500명 정도가 근무했다. 폐업 뒤에도 이 회사에 근무했던 사람들에 대한 정밀검진을 통해 지속적으로 직업병자가 발견되었다[11]. 1993년 111명, 1994년 44명, 1995년 178명이 보고되는 등 1996년 7월 당시 새로 이황화탄소 노출 경력이 10년이 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증상을 호소하며 검진을 바라고 있어 1997년이 되면 위로금을 지급할 재원이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또 직업병으로 이미 인정을 받은 사람들도 여러 병원에 흩어져 일반환자들과 같이 치료를 받고 있을 뿐 이황화탄소중독증에 맞는 관리를 받지 못하고 있었고 때로는 산재환자에 대한 홀대를 겪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 공장부지가 아파트 부지로 3670억원에 매각되었고 산업은행은 원진레이온의 채무를 제하고도 1600억원에 달하는 차액을 남기게 되었다. 원직협과 원진비대위는 통합하여 ‘원진노동자 직업병위원회(이하 원노위)’를 결성하였고 산업은행을 상대로 이득금 일부 원진전문병원 건립기금화 및 재해위로금 추가 출연을 주장했다. 이들은 해를 넘긴 1997년 3월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하였고 44일간의 노숙 끝에 4.24.에 추가 재해위로금 96 억원과 직업병전문병원 건립을 위한 110억원 합계 206억을 산업은행이 출연할 것에 대한 합의서를 조인하였다. 이 기금을 바탕으로 원진종합센터는 1999년 6.5. 원진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원진복지관 등의 직업병 예방과 치료 전문기관으로 출범하였다.


Ⅲ. 협상 모델
1. 이론적 검토

협상이론은 주로 국제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개발되어 왔는데 각 국가의 이익과 힘, 협상당사자의 내부구조와 관련하여 몇 가지 대표적인 이론이 있다. Lebow는 협상이 시작되기 위한 몇 가지 전제조건에 관하여 이론화하였다. Fisher 등은 입장이나 명분이 아닌 이해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협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소위 윈-윈 협상론을 설파하였다. Putnam은 그의 ‘투레벨이론(two level theory)’에서 협상대표 당사자간 게임뿐만 아니라 국내적 차원의 비준여부를 두고 벌어지는 게임이 있으며 이를 모두 고려하여 각국의 win-set이 정해진다고 보았고 win-set의 크기가 바로 협상대표의 협상여지를 말해준다고 하였다. Habeeb는 협상의 과정과 상황에 초점을 맞춰서 협상은 매우 역동적인 것임을 강조하면서 그의 비대칭적 협상이론(asymmetrical negotiation theory)으로 약소국이라도 강대국으로부터 유리한 협상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음을 설명했다. 협상이론들은 협상의 일정한 단면 또는 국면을 이론화한 것으로 그 장단점을 일대일로 비교할 수는 없다. 원진레이온 직업병투쟁 과정은 이러한 협상이론들 모두를 적용하여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연구에서는 원진레이온 직업병투쟁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바로써 과연 직업병피해자들이 강자인 정부와 기업을 대상으로 어떻게 협상을 유리하게 매듭지었는 지에 관하여 초점을 맞추었고 이에 가장 적합한 분석틀로 Habeeb의 협상이론을 활용했다.

Habeeb는 총체적 힘(aggregate power), 이슈별 힘(issue-specific power), 행태적인 힘(behavioural power) 등 세 요소로 협상력의 구성요소를 설명하고 있다. 이 세가지 힘이 역동적으로 작용하면서 협상결과를 결정하므로 약소국이라도 강대국으로부터 유리한 협상결과를 유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2-14].

총체적 힘(aggregate structural power)은 협상 당사자가 외부세계에 자신의 자원(resource), 능력(capabilities), 입장(position)을 통합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라면 인구와 국토, 경제력과 군사력 그리고 외교적 입장 등의 국가적 자원을 극대화하는 것이 바로 총체적 힘이다. 이 힘은 협상자 간의 힘의 구조와 균형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을 드러낸다.

이슈별 힘(issue-specific power)이란 구체적인 이슈에서 한 행위자가 유리한 자원과 입장을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협상 당사자간 갈등의 계기가 된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는 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특정 이슈와 관련된 힘(issue-specific power)을 결정짓는 더 구체적인 요소는 대안(alternatives), 통제력(control), 집중력(commitment) 등 세가지 요소를 포함한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세가지 요소가 상호보완적으로 협상력 증대에 작용한다고 보았다. 대안이란 협상을 통하여 갈등이 타결되지 않을 경우 다른 방법으로 당사자들이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대체적 가치를 말한다. 협상 당사자가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는 여러 대안들을 개발할수록 협상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통제력이란 어떠한 이해관계 즉 보상구조를 갖느냐 하는 것이다. 행위자 수의 제한, 협력하지 않는 행위자에 대한 제재 수단의 보유 등이 그 수단이 될 수 있다. 집중력이란 협상 당사자가 얼마나 절실히 일정한 결과를 확보하려고 하는가를 말한다.

행태적 힘(behavioural power)이란 협상행태와 관련된 힘을 말하는데, 총체적인 힘과 특정 이슈와 관련된 동원 가능한 힘에 대한 고려와 선호관계를 포함하는 행위로서 구체적으로는 행위자의 협상전술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구체적으로 협박, 약속, 보상, 양보, 연합형성 등 다양한 구체적 전술의 형태로 나타난다.

요컨대 Habeeb는 약소국이 강대국에 비해 총체적 힘은 비록 열세이나, 행태적 힘의 구사와 대안 개발· 통제력 및 집중력 강화를 통해 이슈별 힘을 신장함으로써 총체적 힘의 열세를 극복하고, 협상에서 이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2. 협상 당사자와 중재자

협상모델을 적용하기에 앞서 협상에 참여한 많은 당사자들을 분류하고 그 대응의 대강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먼저 협상은 직업병인정과 배상을 놓고 갈등하는 사측과 직업병피해자, 양당사자와 이들의 갈등사이에서 중재 또는 중립적인 입장에 있었던 국회, 노동부 등 중재자로 나눌 수 있다 (표1).

표 2은 협상단계별로 피해자 측, 사측, 중재자를 도식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 측에는 또 여러 단체가 있는데 이들이 협상단계별로 구체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에 관해서는 아래에 자세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아래에서는 각 단체 또는 기구가 전 협상과정을 통해 주로 어떤 기능을 수행했는지를 가지고 피해자 측, 사측, 중재자 중 하나에 포함시켰다. 노동조합은 협상단계 별로 그 입장의 변화가 있었으므로 여기서는 중재자로 분류하였다.

표 2. 
협상단계별 당사자와 중재자
구분 제1기
‘88.8.~’89.12.
제2기
’90.1.~’93.5.
제3기
‘93.6.~’97.4.
피해자측 원가협
대책위
원가협,대책위,
원노협 등
원진비대위(노동조합 등),
원노위, 등
중재자 국회

노동부
노동조합
국회
노동부

노동부
사 측 노동조합
원진사측
원진사측 산업은행
*표에서 중재자의 위치는 피해자 측 또는 사측 중 해당 중재자가 어디에 가까운 지를 나타낸 것임

1) 피해자 측

① 원진 직업병 피해자 가족 협의회(원가협)

1987년 1월에 원진레이온 퇴직노동자 4명이 한꺼번에 노동부 및 청와대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출발하였으며 1988년 7월 구리노동상담소 등에 자신들의 처지를 알렸고 원진대책위와 8∙9월 원진레이온 사측을 상대로 1차 투쟁을 펼친 단체이다. 주로 중증의 직업병환자들로 구성되어 있어 환자의 자녀나 배우자가 열띤 활동을 펼쳤다. 한꺼번에 진정서를 제출한 4 가구가 중심이 되어 1988.8.18.에 17가구가 원가협을 만들었다(대표 정웅섭). 1988.7~8월 회사를 상대로 피해보상에 대한 문제제기를 시작했으며 1988.9.9.에 88 서울올림픽 성화봉송로 인근 평민당구리시지구당을 점거하였다. 1988.9.14. 극적으로 원진레이온 사측과 합의를 만들어 냈고 이 합의서는 향후 피해보상의 준거가 되면서 동시에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합의서에 따라 1988.10.31.까지 검진대상자를 접수하여 인정받은 40가구가 성원이 되었다.

②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노동자 협의회(원노협)

원가협의 최초 합의서에 있는 검진 접수시한이 지났기 때문에 더 이상 해당 합의서에 의한 검진접수가 불가하거나 원가협 피해자들보다 피해 정도가 심하지 않거나 증상이 늦게 나타나 그 때가지 직업병 신고를 하지 못한 사람들이 만든 단체이다. 원노협은 1989.12.21. 준비모임을 갖고 이듬해 2월 최초 12명으로 발족하였다. 원노협은 1990.5.31. 사측과 민사피해보상에 대하여 1차 합의하였는데 원가협과 사측과의 합의서를 모델로 약간 변용한 합의를 채택하였다. 1차 합의에서는 협상일 기준(1990.5.31.) 원노협 등록자를 검진대상으로 하였다가 같은 해 10.30. 2차 합의를 통해 원노협 추가 가입회원을 대상으로 검진할 것을 사측과 합의했다. 이 합의는 원가협과 사측의 기존 합의서에 기한을 연장한 것과 다름 아니었는데, 차이점이 있었는데 이것이 불씨가 되었다. 바로 판정 심의대상을 ‘유해부서에 근무하여 이황화탄소 중독의 가능성이 있는 자’로 한정했던 것이다. 이 문구로 인해 소위 ‘비유해부서’에서 일한 김봉환씨는 판정 심의대상이 되지 못했고 개인적으로 직업병 검진을 받기 위한 노력을 하다가 결국 사망했다.

원가협과 원노협 외에도 1992년 서울대 역학조사 결과 발표에서 노동부 인정기준에는 들지 못했으나 치료가 필요한 직업병유소견자로 분류된 전∙현직 노동자들 88명이 일명 ‘88그룹’을 결성하였고 12월까지 노동부를 상대로 업무상 질병인정기준완화를 주장하였다. 원가협, 원노협 등은 폐업 이후 통합하였다.

③ 원진지원대책위 등 (대책위)

1987년 12월 주경야독하며 공부하겠노라고 충청도 서산에서 서울 영등포로 상경하여 온도계 공장인 협성계공에서 일하던 15세 문송면 소년이 불과 두 달 만에 수은중독으로 쓰러진 사건이 발생했다. 수은중독이라는 사실은 뒤늦게 밝혀졌지만 노동부는 사측의 날인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직업병 승인을 거부했다. 문군의 가족은 수소문 끝에 당시 조영래 변호사가 운영하던 노동상담소에서 일하던 박석운과 만난다. 그는 15세 소년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동아일보 등 주요 일간지에 알렸고(5.11. 보도) 노동부는 뒤늦게 6.29.에 직업병을 인정하지만 며칠 후인 7.2.에 문군은 유명을 달리한다. 이 사건은 일시에 많은 언론에 보도되었고 올림픽을 목전에 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박석운 등은 노동과건강연구회 등 관련 단체와 연대하여 꾸렸던 수은중독사건대책위를 문송면사망대책위로 전환하였고 협성계공 사측과 유족배상을 놓고 협상하였다. 그는 해박한 법률지식과 당시 1987년 민주화 이후 국회에 진출한 노무현 등 노동자를 대변하는 인사들의 도움을 입어 유리한 협상결과를 얻어 내었다. 이것이 바로 1988.7.17.의 일이다. 문송면군 사망소식에 자극 받은 원진직업병 피해자들은 그 이틀 뒤인 19일 구리노동상담소를 방문했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했던 것이다[9].

문송면군 관련 대책위로 모였던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와 노동과 건강연구회,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 등 여러 단체에서 위 박석운을 비롯 김록호, 김은혜 등 헌신적인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이 모여 매우 자연스럽게 원진직업병대책위원회를 결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책위에는 양길승, 김록호 등 의료인들이 결합되어 있어 판정심사위원회에 피해자 측 일원으로도 참석하였으며 박석운 등의 법률전문가는 피해자 측 협상리더로 역할을 했다. 구리노동상담소의 박무영 소장은 현장이 지척인 구리에 있으면서 피해자 측의 활동을 수시로 지원했고 주로 서울에 소재했던 대책위 인사들과의 연락책 역할도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대책위는 산재예방과 관련된 사회운동의 경험을 살려 대외적인 홍보화 협력사업의 측면에서 피해자단체를 도왔다. 대책위는 협상단계별로 ‘원진레이온 김봉환씨 직업병사망사건 대책위’, ‘원진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대책위’ 등 굵직한 이슈마다 그에 걸 맞게 명칭을 바꿔가면서 협상 의제에 맞는 집중력 있는 활동을 펼쳤다. 결국 폐업 이후 최종적으로 원진직업병관리재단으로 관련문제가 해소되면서 대책위의 주요 인사들 박석운, 양길승, 김록호 등 3인은 원노위측 대표 3인과 더불어 6인의 재단이사를 구성한다.

2) 사측

① 원진레이온(주) 사측

1979년 5월 산업은행의 법정관리가 시작되면서 이유학, 서병수 등이 짧은 기간 동안 대표를 역임했다. 1982년에는 전두환 대통령 친척으로 알려진 공군소장 출신의 전창록 대표가 있다가 대선 이후인 1988년 전무로 있던 육사12기이며 육군소장 출신인 백영기가 대표로 취임하였고 1992년 1월까지 일했다. 이후 전무로 있던 우은형이, 1992년 11월에는 전덕순이 마지막 대표를 지냈다. 산업은행 법정관리로 인하여 대표이사는 매우 제한된 재량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정부의 압력으로 중요한 합의시점에 응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원가협과의 1차 합의가 있기 전까지 1987년 방사과에 대한 작업환경측정을 하지 못하도록 한 점, 일부 작업공정을 개선하거나 송기마스크를 지급하고 작업하도록 한 점 등을 볼 때 1981년 홍원표씨 사망사건 이후 점차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측은 원가협의 협상요구에 대하여 제풀에 넘어가기를 바라는 ‘시간지연’ 전략으로 계속 외면만하다가 원가협 측의 성화봉송로 점거 위협이라는 결정타를 당하게 되었다. 백영기 대표(1988.1.~1992.1.)가 중요한 합의에 참여하였고 전덕순 등은 금융전문가로 산업은행은 폐업관련 협상을 염두에 두고 그를 대표로 기용한 것으로 보인다.

② 산업은행 등

원진레이온은 1968년에 이어 1979년 제2차 부도로 산업은행 법정관리체제로 넘어갔다. 산업은행은 한국산업은행법에 의해 1954년에 설립된 특수은행으로 산업금융채권을 독점발행하며 개인금융보다는 기업금융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국영은행이다. 당시 정권 실세와 가까운 전창록, 백영기 등 군인사가 대표를 맡게 된 것도 바로 산업은행 법정관리체제로 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직업병 관련 갈등이 표면화 되었던 시기에 원진 사측과 산업은행 그리고 정권실세는 서로 분리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전창록은 전두환의 친족으로 알려졌는데 역시 5공화국과 운명을 같이하여 1988년 1월 퇴임하였고 곧 이어 육사 12기 출신인 백영기가 취임했던 것이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육사 11기였고 육사12기 로 백영기 대표와 동기였던 박세직이 올림픽조직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1987년 민주개헌으로 가까스로 정권을 유지했고 여소야대로 출범한 제6공화국에게 서울올림픽의 성공은 정권의 명운이 달린 문제였다. 대표 백영기는 그들과 사실상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처지였다.

3) 중재자

① 국회

국회는 갈등의 정점에서 갈등을 중재하고 해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원가협의 제1차 투쟁에서 당시 야당은 1988.8.4. 현장 진상조사반을 파견하였고 이후 적극적인 중재 노력을 기울였고 제1차 합의에 입회했다. 고 김봉환씨 사망 이후 직업병인정문제를 둘러싼 갈등국면에서는 국회 소위를 파견하여 문제를 해소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야당의원 박영숙, 이상수, 노무현 등은 제1차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역시 야당의원이었던 이인제는 1991년 5월 고 김봉환씨 사건에 따른 국회소위 위원장으로 조사보고서를 상임위에 제출했고 이를 통해 문제가 해소되었다. 당시 국회의 중재를 사측은 대부분 받아 들였고 중재의 내용은 대체로 피해자 측에 유리했는데 이는 당시 국회가 최초의 여소야대였고 원진레이온 사측은 군인사가 대표를 하고 있는 국영업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② 노동부

노동부는 이 문제와 직접 관련되는 정부당국이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과 산업안전보건법을 집행하는 정부 부처로 원진레이온은 의정부지방노동사무소 관할 하에 있었다. 나중에 원가협을 결성하는 중증 피해자들 4인이 이미 1987년 1월 진정서를 의정부지방노동사무소에 제출했기 때문에 노동부는 1988년 이전에 이미 원진레이온 직업병문제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의정부지방노동사무소는 이 진정서를 깔아뭉개지 않고 나름대로 절차대로 처리했다. 4인에 대한 직업성질환 여부판정을 위해 임상검사와 작업환경측정을 의뢰하였고 이 결과를 가지고 업무상 질병을 인정했다. 사건이 터지기 직전인 1988. 7.2.에 의정부지방노동사무소는 원진레이온에 대한 특별감독을 벌였고 7.22. 사업주인 법인과 백영기 대표를 산업안전보건법,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입건했다. 법에 있는 만큼은 이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당시 문송면군 수은중독에 대하여 서울 남부지방노동사무소 직원들이 직무유기로 해임되는 등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발 빠른 조치가 있었던 게 아닌가 여겨진다. 하지만 원가협 등이 8.1. 원진레이온 사장실을 일시 점검하면서 1986년 노동부가 사측에게 2백5십만 시간 무재해 표창을 수여한 사실을 확인하면서 노동부의 전력이 드러나게 된다. 8.5. 야당 국회의원들 진상조사반은 지난 13년간 8명이 이황화탄소 또는 황화수소 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노동부가 표창한 엄청난 시간 동안의 무재해와 매우 거리가 먼 것이었다. 노동부는 바로 이 시점부터 주로 이 무재해 기록증을 발급한 사실로 인해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된다.

원가협과 사측의 제1차 합의는 주로 민사 손해배상에 관한 것이었으므로 노동부는 중재자의 역할은 하지 않았고 다만 국회와 여론의 관심사인 합의를 존중해야 했다. 합의 이후 노동부는 ‘상당 인과관계’인 경우에도 직업병을 인정할 수 있도록 업무상 재해인정기준을 개정했다 (1989.12.5.). 이 인정기준은 고 김봉환씨 관련 사건 이후 더 완화되었고(1991.11.1.) 서울대 역학조사 결과발표 이후 전문가 공청회를 거치면서 다시 폭넓게 인정하도록 조정되었다(1993.5.6.).

노동부는 산재보상에 있어서 피해자 측과 사측의 결정을 좇기만 하는 모양새였다면 산재예방에 관해서는 이 보다는 비교적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1989.2.16. 본부에 산업안전국을 신설하였고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자 당시 최병렬 장관은 심지어 노동부내 가장 유능한 인력들을 산업안전국 산업보건과로 배치할 것으로 명했다[6]. 1989년 정부가 중심이 되어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을 제출했고 1990년 개정 및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대책위에 속한 노동과 건강연구회 인사들이 독자적인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을 내놓았지만 반영하지 않았다. 다만 이 법률에는 종전의 그것에 비해 교육이 매우 강조되어 있는데 이는 원가협과 사측의 1차 합의서에 안전보건교육을 강조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1차 합의 이후 잦아 들었던 원진레이온 관련뉴스가 1991년 고 김봉환씨 사건 이후 봇물을 일자 노동부는 ‘직업병종합대책’을 마련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하였고 이듬해 이를 시행했다. 종합대책에는 보건관리체제 및 건강진단제도의 내실화, 작업환경관리의 전문성 제고, 직업병 판정 및 치료의 합리화, 사업장내 근로자 건강관리의 내실화, 전문의 제도의 도입과 연구 활성화 등 전문인력의 확충, 각종 의료 및 측정 장비의 현대화 등이 포함된 것이었다 [6, 15].

노동부는 폐업 이후에는 폐업대책과 관련하여 노사정 합의에 중재자로 참여했다. 원진레이온 직업병 투쟁 및 협상과정에서 노동부는 시종 끌려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 행정부처의 일반적인 모습이기도 했지만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직업병 판정과 작업환경조사 등 분야에 대하여 노동부가 전혀 준비되지 않은 탓도 컸다.

③ 노동조합

원진레이온(주) 노동조합은 1966년 11월 결성되었고 유니온샵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조합원은 1990년 10월 현재 1200명 정도로 남성과 여성 비율은 7:3 이었다 [14]. 보통의 노사분쟁이 노동조합과 사측의 대립양상인데 비해 원진레이온 직업병 투쟁은 질병으로 먼저 퇴사한 노동자들과 사측의 갈등으로 촉발되었다. 원진레이온 노동조합은 사건이 원가협에 의한 1차 투쟁기에 사측을 옹호했다. 이황화탄소중독의 심각성이 점차 알려지고 직업병자가 재직자 중에서도 나오면서 노동조합은 중재자 또는 피해자 측에 서게 되었다.

노동조합은 처음에 원가협 등 직업병 피해자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관련하여 김록호는 ‘원진레이온 직업병투쟁의 역사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당시의 노동조합이 선배 노동자의 직업병 호소를 외면하였다는 것이다. 같은 부서에서 일하던 선배 노동자들이 회사와 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데 후배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하여 지원투쟁을 해주었다면 훨씬 유리한 지형에서 싸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5]. 노동조합은 직업병문제가 점차 심각하게 드러나자 점차 바뀌어 갔고 급기야 1990.5.16. 제9대 노동조합위원장 선거를 통해 전임 위원장은 산업안전보건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로 불신임을 받고 교체되었다. 새로운 전광표 위원장은 같은 달 5.31. 원노협과 사측의 합의에서 입회인으로 참석하는 등 노동조합은 서서히 사측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또 고 김봉환씨 사건 이후 낮은 농도에서도 직업병이 발생할 수 있고 주로 퇴직 후에 발생한다는 점 등을 알게 되면서 피해자단체와의 적극적인 연대를 모색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폐업 전까지 노동조합과 피해자 단체간의 구체적인 연계사업은 모색되지 못했다. 노동조합은 폐업문제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자 폐업 직전인 1993.6.21. 원가협 등 피해자 단체와 관리직 사원까지 아우르는 조직 원대위에 결합한다. 원가협과 김봉환씨 대책위 등이 사측과 맺은 합의서에서 항상 현직 노동자들에 대한 작업환경측정 및 건강검진, 유료 산업안전보건교육의 실시 등 보상뿐만 아니라 재직자들에 대한 안전보건을 합의에 포함했던 것도 이러한 변화에 일정 정도 기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3. 협상 모델에 따른 각 측의 협상력 평가
1) 총체적 힘(aggregate structural power)

피해자 측은 처음에 사측에 비해 자원, 능력, 입장 등 총체적 힘이 극도로 열악했다. 그러나 위 제2장에서 투쟁의 전개과정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1기 합의서부터 검진과 보상이라는 기제를 갖추었으므로 점차 많은 사람들이 결합할 수 있었고 대책위 인사들은 산업의학 및 법률에 관하여는 오히려 제도권에 뒤지지 않는 전문역량을 지원함으로써 총체적 힘을 높여 갔다. 최초 사측이 원가협에 대하여 시간지연 전략으로 협상을 회피한 것은 원가협의 총체적 힘의 열악함을 공략했던 것인데 원가협 등 피해자 측은 총체적 힘을 고양해나가는 동시에 이슈별 힘 등에서 우위를 점하면서 협상력을 급속히 높여 갔다. 반면 사측은 자신의 총체적 힘을 제대로 협상력으로 전환시키지 못했다. 문제가 눈덩이처럼 커져가는 속에서도 안일하게 총체적 힘만 믿고 이황화탄소 중독증에 대한 사측 나름의 충분한 이해와 이슈별 대응을 해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편 사측 위의 사측이라 할 수 있는 정부 수뇌부의 총체적 힘도 논해야 한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대책위 인사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렸고 경찰은 시위 때마다 사측보다 먼저 피해자 측을 막아 서기 일쑤였다. 하지만 1988년 9월 이 거대한 공룡에게도 약점은 있었으니 약점을 공략 당하자 오히려 원진레이온 사측에 합의를 종용하는 힘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 약점이란 바로 88서울올림픽의 성공이었는데 정권의 정당성의 명운을 건 가장 중요한 목표였고 다른 어떤 것도 그것과 견주어 사소한 것에 불과했던 것 같다. 분명 피해자 측의 승리는 이런 이슈와 관련된 구조적인 힘의 우위에서 그 주된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2) 이슈별 힘(issue-specific power)

총체적 힘과 함께 구조적 힘을 결정하는 것은 이슈별 힘인데, 각 요소를 우선순위 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집중력(commitment)

가족 보다 소중한 가치는? 동병상련 보다 더 끈끈하게 사람을 묶는 이념은? 아마 이런 질문에 대하여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건 없다’라고 답할 것 같다. 원가협은 ‘동병상련’의 ‘가족’들로 구성된 조직이다. 이들이 같은 적을 두고 싸웠던 것이다. 그들의 투쟁에 대한 몰입과 헌신이 어떠하였으리라 하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1991년 김봉환씨 직업병인정을 위한 137일간의 투쟁은 그들의 투쟁에 대한 몰입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양길승 원장은 그 집중력의 근거를 ‘정의’에 대한 확신이라고 했다. ‘보상에 눈이 멀었다’는 일부 야유에 대하여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우리가 옳다’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평가했다[4]. 사실 1987년 이전이었다면 그것은 ‘정의’로 읽히지 않았을 것이다. 1987년 민주개헌과 이후 조성된 여소야대 정국이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투쟁은 ‘정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국회가 시종 피해자 측에 온정적이었던 점과 노동부가 뒤늦게라도 직업병 인정기준을 합리화하면서 합의를 존중한 것이나 산재예방대책을 속속 내놓았던 것은 피해자 측의 정의에 대한 ‘확신’을 더욱 고양했다.

이슈에 대하여 주요 신문방송도 거의 모두 직업병 피해자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피해자 측에 유리하게 보도했다. 시대적 정의에 부합한다는 점 외에도 거기에는 환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보편적인 시각이 작용한 것 같다. Talcott Parson가 말한 ‘환자역할’이 바로 그것인데 보통 환자는 사회적으로 책임을 면제받을 권리가 있고 자신의 질병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보통 급성의 감염병과 관련된 이론이지만 질병이 자연적인 것일지라도 그럴진대 산업전사로 열심히 일하다가 사측의 무책임으로 병을 얻었다면 그러한 시선은 오히려 공고해진다[16].

② 통제력(control)

1988년 당시에는 손해배상은커녕 명확하게 업무와의 인과관계가 있는 질환도 산재보상을 받기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송 없이 사측과 집단적인 합의를 통해 배상액 최고 1억 최저 1천만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강력한 유인구조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배상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모든 합의에서 사측에 예방책을 주문했고 추가적인 환자발굴도 합의에 넣었던 것이다. 유급 산업안전보건교육 실시, 작업환경측정과 직업병피해자 추가 발견을 위한 검진 또는 역학조사 실시, 해고자 복직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처음엔 적대적이었던 노동조합 등 현직 노동자들에게 자연스런 연대의 손짓이 되었고 직업병을 인정받은 뒤엔 그들이 든든한 구성원이 되도록 했다. 또한 노조활동과 관련하여 해고된 직원들에 대한 복직도 합의서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전략은 모두 통제력 즉 유인구조를 확고히 함으로써 상대의 분열전략을 무력화 하는데 기여했고 결국 협상력을 증대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사측은 정부 수뇌부가 임명하는 제한된 임기를 갖는 사장단에 불과했다. 그들이 쓰는 통제전략이라는 것이 재직자를 해고하거나 징계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은 나중에 통제력으로 작용하기 보다는 당초 사측에 있었던 노동조합 마저 등을 돌리게 했다.

③ 대안(alternative)

민사배상 합의를 위한 협상이었기 때문에 협상이 결렬된다고 해도 법원에 민사재판을 신청하면 된다. 원가협 등 피해자 측은 이미 퇴사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에게 불이익을 줄 수도 없었다. 또 대책위 인사들은 원가협이 민사소송을 제기할 경우 이 절차를 지원할 수 있었다. 물론 사측도 많은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이 많은 에너지가 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원가협 초기 주요 성원들은 업무상 재해를 이미 인정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민사소송을 제기할 경우 승소할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 대안전략이 된 셈이다. 이에 비해 사측은 피해자 측을 무시할 수도 또는 강력하게 제재를 가하거나 진압할 수도 없는 상태로 별도의 자기만의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3) 행태적 힘 (behavioural power)

총체적 힘과 이슈별 힘은 협상에서 모두 큰 구조를 좌우하는 힘에 관한 설명이다. 협상과정 힘의 미세한 구조는 행위자의 구체적 행위에서 비롯된다. 행태적 힘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구체적 상황에서 협상당사자들이 다양한 전술을 어떻게 구사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1988.9.9. 피해자 측의 전술은 가장 극적으로 행태적 힘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 사례이다. 9월 초 사측은 지연전략으로 일관하고 있었고 원가협 측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피해자 측 리더들은 결단이 필요함을 느꼈고 14일 예정된 구리 교문사거리에서 벌어질 88서울올림픽 성화봉송행사를 겨누게 된다. 당시 성화봉송 행사는 ‘문화의 총체적 동원’이었다[17]. 그 행사가 이제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고개만 넘으면 서울이고 최종 성화 채화일이 3일 앞으로 다가온 때였다. 정부가 봉송로 1km 내에서 시위를 하면 불법시위로 처벌한다고 고지한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었다. 피해자 측 리더들은 행사장 인근에 있는 평민당사를 점거할 계획을 평민당 구리지구당위원장에게 비밀리에 알렸고 위원장은 ‘점거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1988.9.9. ‘성동격서(聲東擊西)’ 작전을 전개하는데, 피해자 측은 먼저 원진레이온을 항의 방문했고 저지당하자 곧바로 바로 평민당 구리지구당사를 점거한 것이다. 그리고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등과 연계하여 각국의 언어로 번역하여 원진레이온 직업병문제의 심각성을 해외에 알리는 시위를 하겠다고 했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행사에 대한 정면도전이었고 이 ‘협박’은 먹혔던 것이다. 원가협과 대책위의 박석운, 박무영 등이 이 전술의 중심에 있었다. 이 전술은 절호의 시기, 매우 유리한 장소와 이를 놓치지 않는 리더의 지략이 모여서 강력한 행태적 힘을 만들어 냈던 것이었다. 그 힘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협상에 참여했던 피해자 측의 인사는 사측과의 협상은 마치 ‘어린애 손목 비틀기’와도 같았다고 회고했다.

고 김봉환씨 직업병인정투쟁에서도 피해자 측의 전술은 사측을 압도했다. 김봉환씨 장례식을 87일째 미루다가 1991.3.31. 치르게 되는데 이것은 유족과 대책위가 서로 합의하에 장례식 형식의 투쟁을 전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야말로 ‘벼랑 끝 전술’이었다. 이것은 유족과 대책위 사이에 강력한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공장 앞에서 남편의 시신을 놓고 시위하는 아내, ‘벼랑 끝’이 따로 없다. 타결이 이뤄질 때까지 유족이 보인 인내심은 대책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요컨대, 피해자 측의 행태적 힘이 극명하게 드러난 순간은 바로 1988.9.9. 그리고 1991.4월 투쟁이었다. 이후 벌어진 투쟁은 바로 이 힘에 의해 기울어진 대세, 파죽지세(破竹之勢)와도 같이 피해자 측이 우세했다. 행태적 힘이 돋보인 사례는 또 있다. 바로 십시일반(十匙一飯) 전술인데, 1997년 산업은행과 추가기금출연을 위한 협상과정에서 피해자 측은 사상 유래 없이 배상금을 각출하여 원진의원을 세웠던 것이다. 실제로 필요한 것이기도 했지만 ‘전문병원설립’의 필요성과 명분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라고도 해석된다. 충분한 매각대금을 가지게 된 산업은행 측에게는 그저 명분이 필요했을 뿐 피해자 측과 갈등할 의지는 거의 없었으므로 피해자 측은 딱 그것만을 제공했던 것이다. 이 합의를 끝으로 10년에 걸친 원진레이온 직업병투쟁은 종결되었다.


Ⅴ. 토의 및 결론

원진레이온 직업병문제와 그로 인한 협상과정은 우리나라의 산재보험 및 산업안전보건체계에 큰 변화를 초래한 사건이었다. 학문적으로는 의학적인 조명이 일부 있었을 뿐 투쟁과 협상과정에 대한 사회과학 연구자들의 접근은 거의 없었다. 원진레이온 직업병투쟁은 국제협상이 아니라 우리나라 내에서 있었던 갈등의 조정이었다는 점 그리고 갈등의 대상이 직업병이라는 과학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고 그 비중이 크다는 측면에서 주로 권력과 명분이 중요한 국제적인 갈등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설명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Habeeb의 이론이 당초 국제관계를 설명하는 모델로 만들어지긴 했으나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설명 변수들이 일반적인 협상당사자들에게 적용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으며 직업병이 일정한 과학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긴 하지만 그 인정범위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다는 측면에서 이 이론에 의한 해석은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이 연구에서는 짧게는 4년 길게는 약 10년에걸친 원진레이온 직업병투쟁의 전개를 단계별로 재구성하여 살펴보았고 총체적 힘에서 절대 열세였던 피해자 측이 어떻게 강자인 사측과 정부를 상대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었는지를 Habeeb의 비대칭 협상모델을 이용하여 조명했다.

요컨대 피해자 측은 헌신과 믿음, 좋은 대안, 적절한 유인구조를 만들어서 이슈별 힘에서 우위를 점한 가운데 적절한 ‘협박’, ‘벼랑 끝 전술’의 활용으로 행태적 힘에서도 절대 강세를 보여 총체적 힘에서 우위에 있었던 사측과 정부를 상대로 유리한 협상결과를 얻어 냈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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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강신표, 서울올림픽 문화축제 - 성화봉송에서 개·폐회식까지.